연말 드림 합작
오이카와 토오루 x 이소노 카논 (대학생 AU)
미야기를 벗어나 도쿄로 상경한 지도 어느덧 햇수로 3년-, 하고도 그 끄트머리. 12월이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이었다. 언제라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겠느냐마는, 대학교 3학년이 된 이후로는 더더욱 여유가 없어졌다. 함께 들을 수 있는 강의도 줄어드는 것도 모자라 연습이니, 대회니, 공연이니 각자의 스케줄로 좀처럼 만날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악착같은 스케줄 조정으로 한 달에 한 번, 서로의 집에서 만나는 것만큼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의 스케줄에 조금이라도 사소했다면 불가능한 일이 될 뻔했다.
11월의 끝 무렵. 두 사람은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만나 저녁을 먹고, 카페에 들어가 푹신한 쿠션을 덧댄 의자에 앉자마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혹시 자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이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을 때쯤에 카논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푹신한 쿠션에서 등을 떼는 그 간단한 일은 찐득한 접착제가 붙은 사람처럼 여간 힘들어 보였다.
"…토오루."
"응―?"
"다음 달이면 벌써 12월이야."
벌써 그렇게나 됐어-? 라는 말과 함께 테이블에 엎어져 고개만 슬쩍 들어 카논을 보던 그가 몸을 느릿하게 일으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앉아있어도 제법 큰 키를 자랑하는 그는 길쭉한 팔을 천장을 향해 쭉 뽑아 올리며 기지개를 길게 켜 올렸다. 올라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의자를 당겨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았다. 테이블 위를 차지하던 두 개의 조각 케이크와 머그잔에 담긴 두 잔의 음료는 어느새 옆으로 밀려나고 글씨가 빼곡하게 들어찬 다이어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귀퉁이가 마모된 하드커버의 다이어리는 팔락거리며 12월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앞 장만큼은 아니었지만 12월에도 이미 며칠의 일정이 들어앉아 있었다. 오이카와는 컵을 기울여 말간 허브 티를 조금 마시며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바쁜 거 아니에요, 카농쨩? 그러다 쓰러지면 오이카와씨 울어요-"
"어휴. 쓰러지긴…그것보단 우리. 다음 달엔 언제 만나는 게 좋을까?"
"음―"
오이카와는 재킷의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 스케줄을 정리하는 앱을 켰다. 중요한 대회나 시합은 이미 끝났고, 합동 훈련 스케줄을 찾아보니 내달 중순이면 마무리가 되었…지만. 말일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여러 송년회가 미리 자리를 잡고 있었다.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달력을 살피던 두 사람의 미간은 쉽게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고심 끝에 고른 날은 25일. 크리스마스였다. 물론 저녁에는 두 사람 다 약속이 잡혀 있긴 했었다. 그렇다고 이보다 더 날짜를 늦추자니 진짜 연말이라 가족을 외면할 위인은 되지 못했고, 곧바로 신년이라 만나기가 참 애매했다. 카논은 파란 볼펜으로 25일에 여러 번에 걸쳐 동그라미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25일에 늦어도 열한시까지! 내 자취방에서 보는 거야?"
그렇게 12월 25일. 손목에 채워진 시계는 10시 40분을 조금 지나 있었다. 학과에서 잡혔던 크리스마스 파티 겸 송년회에서 부랴부랴 몸을 빼낸 보람이 있었다. 두고 나온 물건은 없는지. 무엇보다도 카논에게 줄 선물은 잘 있는지 종이가방 속 내용물도 꼼꼼하게 확인해보았다. 준비가 완벽하게 됐음에 만족하며 선술집의 입구에서 걸음을 옮겼다.
카논의 자취방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라 나쁘지 않았다. 술을 잘 마시는 편이긴 했어도 카논과의 약속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술을 입에 대지 않으려 했었다. 분위기상 거절하기 어려워서 입 안에 털어 넣은 술들은 전부 도수가 높은 축에 속하는 술이라 정신이 조금 몽롱했다. 행여나 술 냄새가 나진 않을까, 코를 옷에 박고 여러 번 킁킁댔지만 불쾌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건널목에서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큼지막한 두 손으로 뺨을 팡팡 두드리며 몽롱한 기운을 쫓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혹시라도 먼저 집에서 기다리고 있진 않을까, 조바심을 내며 카논이 사는 빌라에 도착했다. 익숙하게 입구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출입문이 열리니 재킷의 안주머니에 넣어둔 탈취제를 구석구석 뿌려준 다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인 덕분에 건물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그는 콧노래를 작게 흥얼거리며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를 무렵이었다.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응, 카농쨩~"
전화를 받자마자 경쾌한 멜로디와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됐다. 그 소리가 들렸는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제 연인의 목소리는 조급함이 묻어있었다.
[토오루, 도착했어?]
"응~ 집에 없나 보네?"
[응…그것보다 나, 배터리가 없어서….]
"어딘데? 데리러 갈게."
[아냐! 괜찮아. 걸어서 금방이야.]
"안-돼. 밖에 많이 위험하다구요-?"
[밖에 춥잖아. 몸 좀 녹이고 있어. 최대….]
삐리릭,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배터리가 없다더니 전원이 꺼진 모양이었다. 오이카와는 찝찝한 표정으로 액정을 들여다보며 입맛을 다시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집주인을 대신해 집안 곳곳의 전등을 켰다. 카논의 선물과 함께 가방에 챙겨온 몇 개의 캔맥주를 보관하기 위해 냉장고를 열어보니 덮개에 씐 무언가가 빼곡히 선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애써 준비한 흔적을 미리 알아버린 게 미안해져 오이카와는 콧노래를 마저 흥얼거리며 캔맥주를 밀어 넣고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
"엑,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벽면에 붙은 시계를 보고 아차, 싶어 손목을 보니 손목시계는 11시 15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집주인이자, 제 연인은 약속에 늦지 않기 위한 습관이라며 핸드폰과 손목시계를 제외한 모든 시계를 5분에서 10분 정도 빠르게 맞춰놓는다는 게 문득 생각났다. 오이카와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아직 외투를 벗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머플러와 코트를 팔에 걸치고 닫혀있는 카논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들어갔다.
방 안에는 금방이라도 카논이 옆에 머물다 잠깐 자리를 비운 것처럼. 카논이 평소 사용하는 향수의 향이 옅게 남아 있었다. 벽면의 옷걸이에는 그의 몫으로 추정되는 비어있는 원목의 옷걸이가 덩그러니 걸려있었다. 그는 익숙하게 옷을 걸고, 카논의 침대 헤드에 기대있는 푹신한 쿠션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따끈한 바닥과 푹신한 담요의 감촉이 경직된 몸을 풀어주는 느낌이었다. 오이카와는 향이 희미하게 밴 쿠션을 끌어안고 리모컨을 눌러 TV를 켰다. 화면에서는 영화가 막 시작됐는지, 오프닝 크레딧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늦―어―!"
기다림의 시간은 길고 지루했다. 영화의 내용도 크게 흥미로운 내용도 아니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오이카와는 거실과 연결된 발코니의 문을 열고 뜨끈하게 열이 오른 얼굴을 식혔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애타는 그의 마음을 알기는 하는건지. 영화 속 두 주연은 묘한 눈빛을 주고받더니 웃으며 손을 맞잡고 있었고, 빠른 곡조의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심사가 뒤틀렸는지 오이카와는 뾰로통한 얼굴로 그리 크지 않는 TV의 볼륨을 낮추니 문득 바깥에서 메아리 소리가 들렸다.
진한 색소폰의 곡조를 따라가는 재즈의 박자와는 달리 바깥에서 울리는 메아리는 그보다 더 느린 룸바. 아니, 블루스를 추는 것처럼 발자국 소리는 아주 느리고. 띄엄띄엄 들려왔다. 그가 처음 건물에 발을 들이던 때와 같이 건물은 고요했다. 적막 속에서 울리는 느릿하게 울리는 굽소리는 집주인이 없는 집을 외로이 지키는 오이카와의 가슴을 두근두근 뛰게 했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발걸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도어락의 덮개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현관 앞까지 나간 그는 환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온 당사자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카―논―!"
"미안-. 많이 기다렸지―"
찬 공기를 품고 있는 외투가 피부에 닿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카논을 세게 끌어안았다. 지난달에 만난 이후로 과장을 조금 보태서 정말 한 달 만에 만나는 카논이었기에. 더불어 애타게 기다렸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감았던 팔을 카논이 두어 차례 팡팡 두들기고 나서야 감옥처럼 옭아매었던 오이카와의 팔이 풀리면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던 카논이 얼굴을 들었다. 찬바람에 발갛게 오른뺨으로 눈웃음을 헤실 짓는다.
"늦었지만 무사히! 도착했답니다~"
헤헤, 하며 웃어 보이자 알코올 향이 훅하고 코끝을 찔렀다. 부츠를 벗은 카논을 마루로 끌어올리다시피 한 오이카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바람을 맞아 뒤엉킨 카논의 앞머리를 손끝으로 살살 쓸어내렸다.
"카농쨩. 술 마셨어?"
"응!"
"…얼마나?"
"음―."
곰곰이 생각에 잠긴 카논 대신 오이카와가 목에 둘러 매인 목도리와 코트를 벗겨내었다. 목도리와 한데 뒤엉킨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린 카논이 평소보다 한 톤 정도 올라간 높은 목소리로 손가락 두 개를 접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세 잔! 정도?"
"취했어 카농쨩~"
"그래도 어지럽진 않은걸-"
그에게서 제 코트와 목도리를 빼앗아 제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흥겨워 보였다. 헤어밴드로 긴 머리가 거슬리지 않게 단출하게 묶어 올리고 주방으로 걸어 나왔다. 식탁 의자에 앉아있는 오이카와의 뺨에 입을 맞추고 떨어지는 카논에게서는 달콤한 향기가 맴돌고 있었다. 언젠가, 본인 취향의 선에서 골라서 카논에게 선물했던 향수였다. 계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카논은 향수를 잘 뿌리질 않았는데, 오늘 같은 날에 뿌리고 나올 줄이야.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킨 오이카와는 반쯤 내리깔은 눈으로 어느새 냉장고 문을 연 카논의 뒷모습에 대고 일부러 토라진 목소리를 내었다.
"이걸로 무마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카농쨩?"
"역시 안 통하네~"
냉장고의 선반에서 덮개가 씌워진 제법 큰 접시를 꺼내 조리대에 올려두고, 이어서 꼭지를 떼어낸 딸기를 식탁에 올려둔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오이카와는 익숙하게 선반에서 디저트 포크를 두 개 씩 꺼내어 식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카논이 냉장고에 붙어있는 사이, 덮개를 열은 오이카와는 신이 난 목소리로 카논을 돌아보며 물었다.
"크레이프! 크레이프잖아, 카농쨩! 일부러 해준 거야?"
"응."
냉장고에서 정사각형의 유리통을 꺼내 올려놓고, 찬장에서 코코아 파우더를 꺼내는 모습을 보고는 오이카와는 입꼬리를 내려놓지 못하고 조리대를 떠날 생각을 않았다. 커피머신에 캡슐을 끼워 넣은 후에 조리대로 돌아온 카논은 버터나이프로 크림을 듬뿍 퍼내어 크레이프 케이크의 표면에 덧바르고, 체에 밭쳐 코코아 파우더를 뿌리고 식탁에 올려두었다. 카논이 먼저 완성된 커피를 식탁에 올려두고 다른 커피를 뽑을 때, 오이카와는 거실에 두었던 종이가방을 가져와 카논에게 건넸다.
"응? 이게 뭐야?"
"크리스마스 선물!"
"앗…."
카논이 머뭇거리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미안, 나. 깜빡했어."
"엣. 이게 선물 아니었어?"
오이카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식탁에 올려진 크레이프 케이크를 가리켰다. 카논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만나는 날이 날인만큼 한 것뿐이야. 음…뭔가 허전하다 싶었는데, 역시 그거였어."
"괜찮아-, 원래 만나려던 목적이 크리스마스 때문은 아니었잖아?"
"으응…그래도 미안."
"정 신경 쓰이면 나중에라도 챙겨주면 된답니다~"
카논이 무어라 대답하려던 순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기계가 조용해졌다. 커피가 담긴 하얀 머그잔을 들고 대답했다.
"일단 나중에 얘기하고…앉을까?"
"응. 그러자."
오이카와의 자리에 컵을 내려두고 칼을 꺼내 케이크를 먹기 좋게 잘라내었다. 각자의 앞에 놓인 접시에 한 조각씩 올리고 나서 카논이 자리에 앉았다.
식탁 한 편을 차지한 작은 시계는 어느새 12시를 지나 있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크리스마스는 끝났지만.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를 중점에 두고 만난 게 아니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올 한 해도 고마웠어."
"올해만?"
"이 얘기, 작년에도 한 것 같은데…아무튼. 그럴 리가 없잖아."
"알았어, 알았어~ 많이 바빴을 텐데 신경 써줘서 고마웠어. 내년에도 함께였으면 좋겠어."
"내년에만?"
"…."
오이카와가 짓궂게 되묻자, 카논이 눈을 가늘게 뜬다. 오이카와는 금방 입을 샐쭉였다.
"먼저 시작한 건 카농쨩이다, 뭐."
"진짜 얄미워."
먼저 포크를 집어들은 카논이 크레이프 한 장을 돌돌 말아 먼저 입에 집어넣으려던 것을 오이카와가 손을 붙들어 막았다. 다른 손으로 똑같이 크레이프를 말은 포크를 카논의 것에 갖다 대어 가볍게 맞부딪힌 후에 손을 놓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오이카와씨는 카농쨩이랑 쭉. 함께하면 좋겠답니다~"
크레이프를 입에 집어넣고 보기 좋게 우물거리며 맛있다고 요란스럽게 반응하는 얼굴을 보니 카논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피식 웃으며 천천히 먹으라는 말로 대꾸하며 자신도 케이크를 입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