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년회.
일년 되돌아보며 서로 서운했던 일들을 털어놓는 모임.. 이란 것을 우리 집에서 하게 됐다.
파피루스는 단순히 파티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즐거워하니 됐다고 할까. 설명해주는 것도 귀찮고. heh.
우리 괴물들은, 과거의 일을 회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기억력도 좋은 데다 감수성이 예민해서 그런가 다시 과거의 감정에 휩쓸리기 쉬우니까.
그런 우리 괴물들이 이런 모임을 연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의 영웅, 프리스크가 죽은 후 거의 유일하게 내가 자발적으로 맺은 인연.
연진의 권유였다.
* * *
"오, 믿을 수 없어! 우리 집에서 파티라니!"
"heheh.. 파피루스. 스튜가 넘칠 것 같은데."
"세상에!"
괴물들의 왕비, 토리엘이 보내준 음식들로 요리를 안 해도 되는 줄 알고 좋아했는데, 파피루스의 요리에 대한 열정은 내 예상보다 강했고 그로인해 현재 열심히 계란을 젓고 있게 됐다.
물론 마법으로.
스튜는 끓이기만 하면 되고, 파피루스의 자신작인 스파게티를 만들고 있는 중이기에 나는 슬쩍 계란 푼 것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토마토 스파게티인데 계란이 어디에 필요한건지 모르겠는걸. 뭐, 파피루스라면 이걸로 끝내주는 걸 만들어주겠지.
요리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주방을 나가 허공을 잡고 주방 문을 닫는 시늉을 했다. 좋아. 조금 나중에 보는 것이 좋겠어. 안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음들을 무시하고 '지름길'을 이용해 밖으로 나갔다.
시계를 확인하니 오후 2시. 망년회의 시작 시간이 아마 8시였지. 지상을 뜨겁게 데우고 있는 해를 눈구멍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내렸다.
heheh.. 달궈질 것 같은걸.
지하에서 몇백년이나 살아서 그런가. 대부분의 괴물들은 해에 상당히 약했다. 특히 스노우딘 지역의 괴물들은.
이야기를 돌려서 아직 날도 밝고 시간도 많이 남은데다 조금 출출하기까지 한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 현명한지 나는 알고 있다.
이렇게 불쑥 찾아가도 여유롭게 웃으며 맞아주는 상냥한 친구.
"he, 오랜만이야 진."
"어서와 샌즈. 코코아 마실래?"
'지름길'을 이용해 불쑥 나타났는데도 동요 없이 맞아주는 진은 여전했다. 고개를 끄덕여 답하자 곧바로 코코아를 내어준다.
...여름인데 안 더운건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코코아를 잠시 바라보다 마시는 것을 포기하고 독서하고 있은 진을 바라보았다. '꽃의 비밀'이라는 큰 제목에는 모르는 꽃들이 그려져있고 책표지에는 불길한 빨간 잉크들이 점점이 뿌려져있다.
"이거, 꽃말을 이용해서 고백하는 내용이야."
"heh..."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말을 걸어온다.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초반에는 상당히 놀랐었지. 독심술이냐는 의심은 여전하지만.
진하게 맡아지는 꽃향기들과 섞인 달달한 초코향. 분위기 좋은 작은 카페 겸 꽃집을 운영 중인 진은 한 손으로는 뜨거운 코코아를 들고, 한 손으로는 책을 들고있다. 처음에는 책만 들고 있었겠지만 점점 책에 집중하면서 이렇게 된 것이리라.
"그래서, 무슨 일이야?"
책에 고정되어있던 눈이 내게로 이동한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지만 진은 이걸로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눈치가 빠르고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으니까.
...전에도 연진이 알려준 '크리스마스 축제'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heheh...
오늘따라 과거의 일들이 자주 떠오른다고 생각하며 코코아가 들어있는 잔을 만지작거렸다. 뼈와 컵이 부딪치는 묘한 소리.
일년동안 서로 서운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모임. 이랄까 두 명밖에 없지만 말이지.
"망년회, 예비 연습 겸 어때?"
나의 말에 진은 웃으며 답했다.
"망년회 예비 연습이라니, 처음인걸."
이 대답은 yes였다.
진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둘 사이에서 대화가 사라졌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맞을까.
"샌즈는, 우리 첫만남 기억해?"
의외의 질문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거 올해 있던 일이 아닌데 세이프인건가? 그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운한 일이 있던건가.
왁자하게 퍼지는 웃음소리. 아까 진과 했던 예비 연습과는 분위기부처 다른데, 이쪽이 더 나으니 됐나. heh, 그거 후에는 진의 분위기도 엄청나졌었고.
슬쩍 진이 어디있나 훑어보니 저 구석에서 얄심히 마시고 뻗어있는 것이 보였다. 술이 약한건가. 이건 처음안 사실인걸.
"샌즈! 이런 날에 나만 음료수를 마셔야한다니!"
큰소리로 투덜거리다가도 막상 술이 권해지면 얼굴이 잔뜩 굳어버리는 파피루스를 보며 웃었다. 이봐 파피루스. 그거 엄청 독한거야.
짓궂은 괴물들의 장난에 파피루스는 결국 잔뜩 취한 상태로 잠들었다. 그 다음의 표적은.. heh.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다가오는 괴물들을 웃으며 바라보다 '지름길'을 이용해서 윗층으로 옻라갔다.
곧바로 터지는 탄식들을 들으며 킬킬거렸다. 나도 취한 모양이야.
쓰레기 토네이도를 지나 침대에 비척비척 누웠다. 괜히 실실 흘러나오는 웃음. 아, 그러고보니 집주인들이 전부 아웃인 상태이네. 내일 얼마나 엉망이려나..
"우리의 첫만남은 꽃밭이었지?"
내 대답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는 듯 말을 이어가는 진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아름다운 꽃들.
토리엘이 좋아했고, 프리스크가 좋아했었던.
"그곳에서 너를 만났을 때 너는 상당히 여유로워 보였어. 뭐, 곧 아니란 것을 알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 파피루스와 떨어지고 흘러들어갔던 곳이 거기. 후에 말을 들어보니 상당히 찾기 어려운 곳이라고 했지.
"처음에는 잠깐 구경하려고 갔던거라 금방 돌아오려고 했었는데.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지."
나는 그 때 프리스크를 떠올리고 있었다. 우리의 작은 영웅을.
"너는, 나와 있으면 누군가를 떠올리곤 하는 것 같아."
샌즈.
잔을 만지던 손을 멈추고 진을 바라보았다.
은은한 미소를 달고 내가 무슨 반응을 보여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묵이 지속되고 결국, 먼저 포기하고 다시 입을 연 건 진이었다.
"샌즈-"
* * *
술을 너무 마셨는지 얼굴이 후끈거리고 있다. 괴물이라 뼈에도 혈관가 있는건가. 빨간뼈가 되어버리겠어. heh..
망년회라는 건 너무 과하게 솔직해져버리는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소란스러운 아래를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