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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브리엘은 보석함을 열었다. 다섯 칸으로 나뉜 함은 사실 보석함이라는 용도와는 꽤 많이 거리감 있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안에 들어있는 것들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아도 자체 발광이 가능한 물질이기에 함을 열면 눈 앞에서 알록달록한 빛의 파도가 찌르듯 일렁였다. 몇몇 전사들에게도 익숙한 것들이었다. 이따금 그들 중 활달한 성격에, 지시자와 꽤 면식을 터놓은 전사들은 그 속에 색깔별로 담긴 조각들을 바라보며 몇 번이고 캐물었다. 오, 드디어 내 차롄가? 하고.

아가씨, 탐색 나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메렌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에게 단정하게 허리를 굽혔다. 레이브리엘은 뒤를 돌아보았다. 문 너머에 여자아이의 방 안에 함부로 걸음을 하지 않고 바깥 복도의 벽에 기댄 암청색 레인코트 자락이 어설픈 유령 분장의 천 쪼가리처럼 어렴풋 보였다. 본디 수줍음을 은근하게 타는 전사였기에 이제 레이브리엘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별로 방한 내구성이 좋아보이지는 않은데도 레인코트 하나만을 고집하는 게 조금 염려스럽기는 했지만. 그녀는 보석함을 꼼꼼하게 닫고 잠금쇠를 채웠다. 메렌이 신겨준 새 구두는 발에 꼭 맞았고, 무엇보다 따뜻했다. 이거 따뜻하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메렌이 답했다. 눈의 달이니까요. 토끼털을 썼습니다. 구두 앞코를 콩콩 두드려 신고 방 밖으로 고개를 빼끔 내밀었다.

“이데리하.”

응, 하는 대답 대신 이데리하의 시선 두 개가 올곧게 그녀의 눈을 따라 맞추었다. 그녀는 그 나름의 대답 방식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귀여우니까.

“뭐 떠오른 거 없어요?”

“……?”

그리고 화법에 있어서는 뻑뻑하기 그지없는 전사였다. 두서없이 다짜고짜 묻는 것에 질문의 요지를 깨닫지 못하고 옅은 물색 눈동자를 끔뻑거리고, 이어 고개를 저었다. 그 질문에 대한 긍정 여부라기보다는, 미안하지만 다시 한 번 이해 난이도를 낮춰 설명해달라는 메시지에 가까웠다. 레이브리엘은 선선히 그 말을 이었다.

“다음 기억 뭐 떠오르는 거 없었냐고요.”

“…응.”

그러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솔직히 맥 빠지는 대답이었다. 새삼스럽게도 그가 첫 기억을 찾던 순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의 전투능력은 특출나다고 말할 정도까지는 못 되지만, 저 나름대로의 전술이나 임기응변을 바탕으로 기초를 탄탄히 다졌다. 그런 흔적이 엿보였다. 그리고 유독 이지 미스가 잦았던 날이었다. 아침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느라 정신을 판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쯤 실수하면 화가 나는 것을 넘어 답답하기만 했다. 결국 레이브리엘은 팔에 부상을 입은 이데리하를 교체시키고 오늘 왜 그러냐고 따져 물었었다. 그제야 그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꿈을 꾼 것두 아닌디, 자꾸 이상한 걸 본 기분이 들어 갖구 말여. 여기는 아니구 딴 데서…….

깜짝 놀라서 곧바로 저택에 돌아와 보석함을 찾았던 그게 딱 이맘 때쯤이었다. 눈의 달이라는 달력에 걸맞게 하늘의 색이 수시로 잿빛에 고정되고 얼음 결정을 쏟아내는 계절.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발끝이 추위에 질려 새빨갛게 얼고 자꾸만 움츠리게 되는 계절을 레이브리엘은 몹시 마음에 안 들어 했지만, 그래도 그가 첫 기억을 선물 받은 계절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싫지 않아졌다. 그 날 이후로 어떤 전사들의 기억을 찾을 때건 그 몫의 조각만큼은 반드시 남겨두고 그 여분을 썼다. 그 여분이 부족하다면 새로이 탐색을 시행해 필요한 양까지 모았다. 언제든 그가 영몽인지 과거의 현실인지를 구분 못하는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그것을 자신의 뿌리라고 믿을 수 있게끔.

하지만 웬걸 자꾸 늦어지고만 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곤란하네요…….”

“너무 신경 쓰지 말어라. 작년부터 조금 뒤죽박죽인 기미는 있었응께…….”

“자기 기억 찾는 일이잖아요? 조금쯤은 초조해해도 괜찮은데요…….”

“내가 서둔다구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두 아니잖어.”

“영영 못 찾게 되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 땐 그 때구, 지금은 지금이여. 그보다 참 알 수 없는 녀석이구먼.”

“제가요?”

“기억을 빨리 찾게 되믄 내는 부활하게 되는 것이여. 혹시 빨리 부활해서 떠나보내야 할 정도루 내가 싫다던가, 그런 거여?”

“에…….”

이걸 지금 전사가 할 말인가? 표정 없이 툭 던지는 조약돌 같은 말이 자못 섭섭한 듯 이야기하는 것만 같아서, 레이브리엘은 아직 혹한의 바람을 뺨에 쐬지도 않았는데 뺨 언저리가 붉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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