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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 겨울’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겨울나기가 특별히 더 힘든 것도 아니다. 그저, 감흥이 없었을 뿐이다.

 

 

「 캐, 캡틴! 여기 웬 여자 아이가…! 」

 

「 얼음장처럼 차가워! 죽은 거 아냐? 」

 

「 불길한 소리 하지 마, 샤치! 」

 

「 …아직 살아있다. 미약하게나마 맥박이 뛰고 있어. 이대로 실내로 옮긴다. 」

 

「 네, 넵! 」

 

 

눈으로 뒤덮인 어느 마을에서 그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

 

 

 

 

* *

 

소녀에게서는 미약하게 혈향이 베어나왔다. 허나, 소녀가 생채기를 입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시체처럼 쥐죽은 듯이 잠든 소녀의 옷에 튄 핏방울들은 아마 타인의 것이겠지. 그렇게 꼬박 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슬슬 눈을 뜰 시기라고 생각한 순간, 베포가 헐레벌떡 로우에게로 달려와 소녀의 기상을 알렸다.

 

 

“ 캡틴! 여자애가…! ”

 

 

몇 시간을 죽은 듯이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소녀가 눈을 떴다. 그리고 샤치의 다급한 소리에 소녀가 눕혀져 있던 방으로 향한 로우가 목격한 것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위협도 안 되는 베개를 두 손에 든 채 농성을 벌이고 있는 장면이었다.

 

 

“ 자, 잠깐만! 우리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야! 해적이라고! ”

 

“ 뭐, 뭐?! 해, 해적…?! ”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신분을 밝힌 펭귄이었으나 그것은 소녀에게 오히려 역효과였다.

 

 

“ 이 바보야! 해적이라고 말하면 어떻게 해! 겁 먹어버렸잖아! ”

 

 

샤치가 그를 나무라고는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고민하다가 베포에게 시선이 꽂혔다. 사람은 어렵겠지만 동물이라면 조금 긴장을 느슨하게 풀지도 모르겠다며 베포를 떠밀었다.

 

 

“ 아, 안녕…! ”

 

 

마치 사람과 같은 동작으로 손(이라고 썼지만 발일 지도 모른다.)을 내민 베포의 행동에 소녀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하트해적단 선원들은 속으로 효과가 있었다며 감탄했으나 그들이 하나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 고, 고, 고, 고, 곰이 말을 했어?!?!! ”

 

 

하얗게 사색이 된 소녀가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그 모습에 선원들이 우왕좌왕하자 로우가 다가가 소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 놀래켜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 베포, 잠깐 나가있어. ”

 

“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살아있어서 죄송합니다. ”

 

“ 됐으니까 일단 나가있자, 베포!! ”

 

 

추우욱 늘어져 실망한 베포는 샤치와 펭귄의 손에 이끌려 방을 나갔다. 로우는 소녀가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느낌으로 눈을 감고 있음을 눈치채고 말을 걸었다.

 

 

“ 일어나. 깨어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

 

 

아까 쓰러지던 것이 연기라는 것을 눈치 채이자 소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이불을 목끝까지 끌어올리며 로우를 경계했다.

 

 

“ 그리고 죽은 척을 하면 곰에게서 살아남는다는 구설은 잘못된 지식이다. 다음부터는 차라리 도망을 가도록 해. 뭐, 그 이전에 쓰러지는 연기부터가 너무 어설퍼서 꽤 우스웠다만. ”

 

 

소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정신을 잃은 척 했던 연기가 떠올라 고개를 이불 속으로 파묻었다. 로우는 피식 웃기만 할 뿐 다시 평범한 어조로 돌아와 소녀에게 계속 말을 붙였다.

 

 

“ 기분은 어떻지? ”

 

“ 의외로… 괜찮아요.어디 하나 아픈 곳도 없고. ”

 

“ 그렇다면 다행이군. ”

 

“ 저기,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

 

“ 나는 의사다. 하지만… 펭귄이 말했던 대로, 그 이전에 해적이지. 너를 살린 건 사람을 구하겠다는 선의(善意)를 가지고 행한 게 아냐. 어디까지나 변덕이었다. ”

 

“ …변덕? ”

 

 

로우는 어린 시절 추운 겨울 속에서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었던 이와 의사를 찾아돌아다니던 기억을 떠올렸다.

 

 

“ 제안을 하나 하지. 우리 배에 타겠나? ”

 

 

소녀는 처음에는 로우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벙찐 표정을 지었다. 지나가던 ‘해적’에 의해 목숨을 건지다니, 소녀가 가지고 있는 해적이라는 이름을 단 이들은 상식적인 행동을 행할 이들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녀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봐야했다. 어느 누가 자신과 함께 하자고 얘기해준 적이 있던가. 너무 까마득해서, 소녀가 기억하기로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 오, 눈이다! 캡틴, 눈와요! ”

 

 

해트해적단에서 유일하게 여자 멤버인 초아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갑판으로 뛰어나왔다.

 

 

“ 초아, 눈이 얼면 미끄러지니까 너무 뛰지 마라. ”

 

“ 괜찮아요. 이래봬도 운동신경 하나는 좋거든요. ”

 

 

평소에는 이렇게 평범하디 평범한 소녀는 사실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우는 얼마 전, 해군들과 마주쳤던 날을 기억해냈다. 하트해적단이 조금 버거워하던 그 때에, 초아가 전장 한 가운데에 뛰어든 것이다.

 

 

「 초아! 」

 

「 캡틴! 」

 

 

핏줄이 보일 정도로 새하얀 피부를 가진 초아가의 새하얀 원피스는 어느 새 붉은 피로 적셔졌고 하트해적단의 선원들은 놀란 나머지 그대로 굳어버렸다.

 

 

「 역시, 그랬군…. 왜 한낱 평범한 소녀가 현상금이 그렇게나 높은가 했더니, 이런 괴물이었나. 」

 

 

해군들 중에서 머리로 보이는 한 남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하다는듯 말을 내뱉었다. 그에 로우가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보냈으나, 주변에 있는 말단 해군들만 움찔할 뿐, 정작 말을 내뱉은 이는 담담했다. 로우는 초아를 뒤에서 붙잡고 그녀를 말리다가 이내 뒷목을 쳐서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초아의 존재에 겁을 집어먹은 해군들이 주춤하고 있는 사이, 하트해적단은 빠르게 그 곳을 벗어났다.

 

 

「 캡틴, 초아는 괜찮은 거야? 」

 

「 이 기회에 너희들에게 한 가지 묻지. 」

 

 

뱀파이어. 사람 혹은 동물의 피를 마시며 살아가는 존재. 세상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땅으로 뒤덮여있다. 하물며, 인외의 존재가 있다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이 곳은 그런 세계였다.

 

 

「 초아가 무서운가? 」

 

 

로우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선원들은 곧바로 아니다 라는 대답을 하지 못했으나 로우에게 있어서 꽤나 만족스러운 대답을 돌려주었다.

 

 

「 솔직히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야. 하지만 초아는 우리 동료잖아. 」

 

「 맞아. 영원히 하트해적단 선원이라고! 」

 

 

바보같을 정도로 우직한 녀석들. 물론, 로우 역시 ‘고작 이 정도’의 일을 가지고 그녀를 내칠 이유는 없었다. 또한, 한 번 배에 태운 이상 그들의 말대로 그녀는 하트해적단의 선원이었다. 멋대로 배를 내린다던가 하는 일은 자신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 아까 봤던대로 초아는 뱀파이어인 모양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사람이든 동물이든 피를 섭취하지 않으면 안 되지. 」

 

「 초아에게 현상금이 그렇게 높았던 이유가…. 」

 

「 아아. 게다가 목을 가져오라는 것이 아닌, 생포하라고 되어있었지. 해군에게 넘어간다면 어떻게 사용될 지 안 봐도 뻔하다. 」

 

 

하트해적단의 선원들은 초아를 해군에게서 지켜내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고, 다행히라고 해야할지 초아는 전날의 일을 싸그리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 캡틴, 오늘로 딱 다시 한 달즈음인데 이제 슬슬 먹게 해줘야할 때 아냐? ”

 

“ 아아. 그렇지. ”

 

 

초아는 피를 보기 두려워했다. 허나, 그녀가 명확히 두려워하고 있는 건 타인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해칠 지도 모른다는 공포다. 때문에 그녀는 마치 두 개의 인격을 가진 것마냥 자신과 뱀파이어로 변한 자신을 분리하여 지내왔다. 처음부터 뱀파이어였는지, 원래 사람이었던 이가 뱀파이어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로우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 초아가 있던 나라에는 눈이 안 왔어? ”

 

“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흰 눈을 본 기억이 얼마 없어. 어느 새, 새빨갛게 변해있더라고. 깨어보면 그게 다 꿈이지 뭐야. ”

 

 

그 말에 모두가 순간 숨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초아는 그들이 그녀의 발언에 흠칫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로우에게 다가와 물었다.

 

 

“ 캡틴은 눈을 별로 안 좋아해요? ”

 

“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 하지만, ”

 

“ 하지만? ”

 

 

너는 역시 흰 눈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새빨갛게 피로 뒤덮인 눈은 내 눈에만 새기기로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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