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w. 루나
세나 이즈미 x 아라카와 루리
Sena Izumi x Arakawa Ruri
* 드림주(오리주) 등장 O
오전 7시 정각. 창밖은 아직 어두컴컴하다. 평소라면 한창 자고 있을 시각이지만 루리는 이미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달력의 오늘 날짜에는 온갖 색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 잠시 달력을 응시하던 루리가 침대 밖으로 튀어나오듯 달려 나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소위 말하는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 아라카와 루리는 살면서 남자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기에, 데이트라는 것도 루리에게는 정말 생소한 개념이었다.
사실 두 사람이 사귄 지는 꽤 되었다. 백일은 이미 넘은 지 오래. 거의 1년을 향해가는 시점에 둘은 한 번도 데이트를 하지 못했다. 서로가 바빠 데이트할 시간이 도통 나질 않았기 때문에. 오늘은 주말엔 꽉 차 있는 이즈미의 일정을 비우고 만든 특별한 시간이었다. 굉장히 기대하고 있어 루리는 밤잠을 설쳤다.
화장실에 들어와 거울을 들여다보니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니,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루리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좀 더 칙칙해 보이는 인상. 루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같은 날 다크서클이라니, 최악이라며. 이즈미나 아라시가 말했던 수면의 중요성을 이제야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서는 오늘 날씨가 춥다고 말했다. 눈이 올지도 모른다고. 루리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끄고 옷장으로 향했다. 안 추울 수도 있으면서 이즈미에게 예쁘게 보일 수 있는 옷.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옷이 없어 보이는 건지. 옷장 저 끝까지 뒤져보았지만 루리의 마음에 드는 옷은 도통 보이질 않았다. 옷장에 있는 옷을 전부 꺼내버렸더니 바닥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루리는 바닥에 있는 옷가지들을 뒤적거리며 이것저것 자신의 몸에 대보았다. 너무 얇거나, 아님 예쁘지를 않거나. 겨울에는 도통 집에서 나가질 않는 루리였기에 겨울 옷은 잘 보이질 않았다. 평소에 옷 좀 사둘걸.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마침내 무엇을 입을지 골랐을 때에는 바닥이 정말로 엉망이었지만 루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화장대 앞에서 거울을 보는 루리의 너머로 옷가지들이 늘어져 있었다. 이전에 어질러 놓은 것들까지 있어 돼지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데이트 끝나고 집에 오면 정리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한 적이 이번은 처음은 아니지만.
일찍 일어난 시간이 무색하게도 시간은 금방 갔다. 어느새 약속 시각 30분 전. 루리는 엉망이 된 집을 내버려 두고 현관문을 닫았다.
12월은 괜히 12월이 아니다. 일본은 남반구가 아니라 북반구고. 뉴스에서 말한 대로 오늘 날씨는 추웠다. 그것도 좀 많이. 타이즈를 신었다 해도 얇은 나일론 천일 뿐. 치마는 오늘 날씨에 상당히 추운 옷이었다,
약속 장소는 이곳에서 지하철을 타고 얼마 걸리지 않는 곳. 약속 시간 10분 전에 장소에 도착했다. 너무 일찍 도착한 건 아닐까 싶었지만 이즈미도 마찬가지로 일찍 나와 있었다.
이즈미군, 이라 부르려다가 한번 멈칫. 학교 밖에서는 군이라는 호칭 쓰지 않기로 한 것을 이즈미가 상기시켜주고 나서야 루리는 호칭을 바꿨다.
그럼 있지, 이즈밍은 어때? 이즈미가 질색하는 게 눈에 보인다. 물론 질색한다 해도 그렇게 부를 거지만. 이즈밍, 이즈밍. 자꾸 부르니까 귀엽잖아. 마음에 들어 자꾸 입에 담아 본다. 이대로라면 학교에서도 이즈밍이라고 부를 것 같아. 하지만 루리가 이렇게 부르면 다른 아이들도 전부 이렇게 부를 터. 이즈미는 질색하며 제발 교내에서는 자제해달라고 부탁했다.
조금 춥다는 탓에 둘은 가까이 있던 어느 한 카페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얼었던 손이 실내에서는 스르륵 녹았다.
이것 봐, 내 손 다 얼었었네. 이즈밍은 손 괜찮아? 조잘대는 루리를 데리고 이즈미는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창가 자리는 춥기도 하고, 어차피 김도 서려 밖이 하나도 보이지 않기에 이즈미는 따뜻한 카페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즈미는 곧 죽어도 무설탕. 루리는 달콤한 게 좋다며 핫초코를 시켰다.
살찐다며 잔소리를 해도 루리는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오히려 맛있으니까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이즈미에게 핫초코는 그저 설탕 덩어리일 뿐이다. 루리에게 달지 않은 것은 그저 쓴 물일 뿐이고.
루리가 걱정했던 대로 침묵이 이어지는 상황은 없었다. 오히려 조잘조잘. 너무 잘 떠들어서 이즈미가 말할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말할 것이 저렇게 많은 건지. 평소의 이즈미라면 시끄럽다고 입을 틀어막거나 자신의 귀를 막고도 남을 상황이었지만 오늘은 상대가 그 사람이기에. 이즈미는 평소답지 않게 루리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귀담아듣고 있었다. 아마 같은 반의 누군가가 본다면 꽤나 놀랄지도 모를만한 모습이었다.
마냥 카페에만 앉아 있을 수는 없으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어오기 전과 다르게 카페 밖을 나설 때는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물들어 있었다. 카페 안쪽 창에는 김이 서려 있어 보이지 않던 풍경이었다.
눈이네. 응, 눈이야. 같은 연인 같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다. 보통이라면 눈이라고 한쪽이라도 방방 뛰겠지만 이즈미나 루리는 둘 다 눈을 좋아하지 않았다. 루리는 애초에 겨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춥기 때문에. 눈을 안 좋아하는 이유도 단순하다. 눈이 오면 더 춥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가까이 있던 편의점에 들어가 우산을 샀다. 눈을 맞으면 아마 머리가 망가질 것이라는 생각에. 애초에 루리는 눈을 맞는다는 것에 낭만을 잘 느끼지 못하였다. 우산을 계산하고 나오면서 본 눈은 그저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였다.
난 눈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즈밍도 눈 별로 안 좋아해?
이런 말을 조잘거리며 걷다 보니 우산 위에는 어느새 눈이 한가득 쌓였다. 이즈미는 우산 위에 있던 눈을 털어 냈다. 떨어지는 눈의 양이 상당했다.
“원래는 안 좋아하는데, 루리 너랑 보면 괜찮을지도....♪”
몇 초간 정적.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걸까. 이즈미는 루리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먼저 앞으로 걸어나갔다. 눈을 맞으며 멍하니 서 있던 루리의 얼굴이 이제야 알아챈 듯 하얀 눈과 대조되게 새빨갛게 변했다.
“잠깐만, 이즈밍. 한 번만 더 말해주면 안 돼? 아니, 그보다 먼저 가지마!!”
앞에서 먼저 가던 이즈미의 얼굴도 루리의 얼굴처럼 새빨갛게 변했다는 건 덤.
愛でた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