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w. 루나
오키타 소고 x 시로유키 하람
Okita Sogo x Siroyuki HaLam
* 드림주(오리주) 등장 O
겨울.
하람에게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계절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꽃이 피지 못하는 계절이기에. 카부키쵸 꽃집 사장님은 겨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겨울에는 하람도 덩달아 시든다. 시들시들. 보는 사람마다 겨울에는 하람이 기운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사실인 것 같다. 하람은 창문을 한번 열어보고 찬바람에 몸서리치면서 창문을 닫았다. 창밖에는 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하람은 눈살을 찌푸렸다. 눈이 온다는 건 날씨가 춥다는 걸 의미하니까. 눈은 세상을 얼린다. 어린아이들에겐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하람은 이제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더 이상 눈을 보며 신나게 뛰어다닐 나이가 아니다. 이름은 하얀 눈인데 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니. 아이러니다. 웃음이 나왔다.
창밖을 조금 더 보고 있으니 새카만 제복을 걸친 남자 두 명이 지나간다. 바퀴벌레 같아, 쯧. 남자들을 본 하람이 괜한 데에 화풀이를 한다. 남자들은 순찰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순찰 때문에 바쁘다고 한 애가 이 주변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부하들이나 부려먹고 본인은 둔영에 누워서 낮잠이나 자는 거겠지. 그 생각을 하니 다시 화가 나 하람은 고개를 내저었다.
신센구미 1번대 대장 오키타 소고. 평소엔 둔영, 혹은 길거리 아무 데서나 대충 누워 낮잠만 자는 사람. 그런 애가 연말이라고 바쁠 리가. 아마 바빠도 누군가에게 일을 떠맡기고 또 낮잠이나 자고 있을 터다. 그런데도 소고는 바쁘다는 핑계로 코빼기도 보이지도 않았다. 연락했을 때도 일하는 중이라나 뭐라나. 흥, 말이 되는 소리를 하지. 언젠가 하람은 신센구미 둔영에도 직접 찾아갔었다. 결과는 대차게 까임. 얼굴은커녕 목소리도 듣질 못했다. 히지카타와 고릴라가 얼마나 열심히 쫓아내던지. 오늘은 안된다느니, 소고가 없다느니. 횡설수설하는 그들의 모습에 하람은 그대로 뒤돌아 집에 돌아왔다. 셋 다 너무 보기 싫었다.
그 뒤로는 하람도 연락을 끊었다. 너무 분해서. 하는 건 땡땡이밖에 없으면서, 만나주지도 않고! 먼저 연락해줄 때까지 나도 연락 안 할 거야! 전쟁 시작이야, 오키타 소고!
그렇게 패기 넘치게 다짐한 지 어연 몇 주일. 오늘이 며칠이더라, 하람은 벽에 걸려있는 달력에 시선을 돌렸다. 하루, 이틀, 나흘. 시간은 흘러 흘러 벌써 31일이었다. 12월 31일. 한해의 마지막. 날짜 감각 없이 집에서만 살다 보니 크리스마스가 그냥 지나 간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근 일주일동안 소고에서 온 연락은 한 통도 없었다. 진짜 너무해. 하람은 탁자 위에 있던 핸드폰을 들고 메시지 창을 띄웠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꾹꾹 입력했다.
‘오늘도 연락 없으면 그냥 헤어져 버릴 거야.’
입력한 문구를 잠깐 들여다보던 하람이 전송 버튼을 꾹 눌렀다. 전송 중이라는 표시가 빙글빙글 돌다가 사라졌다. 전송 완료. 화면을 끄고 다시 핸드폰을 탁자 위에 올려뒀다.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 힐끔힐끔 눈길이 갔다. 과연 저 폰이 오늘 울릴까? 안 울릴까?
* * *
메시지를 보내고도 3시간이 지났다. 답장은 여전히 오지 않고 있다. 시계 침은 똑딱똑딱 움직인다. 시간도 가고 있다. 폰은 여전히 울리지 않고 있다.
하람은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아아, 연말인데 나는 남자친구한테도 걷어차이고 혼자 이게 뭘까...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으니 더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문득 핸드폰이 울었다. 스팸 문자로. 잠깐이나마 설레었던 하람의 마음은 화면을 켜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저 땅끝까지 추락했다. 이모티콘으로 잔뜩 얼룩진 것이 보기 아주 꼴 보기 싫었다. 차단 버튼을 꾹 누르고 핸드폰을 저쪽으로 던져버렸다. 핸드폰이 벽에 부딪혀 벽이 패였다. 어쩌면 핸드폰 액정이 나갔을지도 모른다. 하람은 주섬주섬 일어나 핸드폰을 주워왔다. 이게 얼마짜리인데. 약정도 끝나지 않은 핸드폰이 망가지면 큰일이다. 조심스럽게 버튼을 누르자 다행히도 핸드폰은 잘 작동했다. 하람은 핸드폰을 들고 와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하람은 그 뒤로도 한참동안 누워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창밖에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지는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저녁이 오고 있었다. 하람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핸드폰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창밖은 이제 눈이 그쳤다. 하얗게 거리에 내려앉은 눈뿐이었다. 어두워진 거리의 가로등 빛에 눈이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저녁이라고 졸려. 몰려오는 잠에 애써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하람은 자다 깨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세 번째 자다 깨기를 반복할 때 즈음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에 하람은 그만 잠이 달아나고 말았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을 텐데, 하람은 침대에서 일어나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너무 오랫동안 누워 있었더니 머리가 핑 돌았다.
“꼴이 그게 뭡니까, 누님.”
하람은 현관문을 닫았다. 그대로. 아니, 닫으려고 했지만 손 하나가 문을 붙잡고 그대로 다시 열었다. 하람보다 훨씬 센 근력에 닫히던 문은 그대로 활짝 열렸다.
“ 오랜만에 보는 건데 그런 반응이면 섭섭하죠. 제 얼굴이라도 까먹으신 겁니까?”
히이이익. 하람은 그대로 뒷걸음질 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연락 안 받으면 전쟁이라고는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은 몰랐거든?! 항의하듯 말하는 하람의 말은 일체 무시하고 소고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제가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압니까? 넘어져 있지만 말고 얼른 일어나시죠.”
하람의 표정이 꽤 당황한 게 눈에 보였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보려 하는 듯 입이 뻐끔거려 소고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곤도상이랑 히지카타상이 못 나오게 얼마나 막던지. 나오는 데 좀 힘들었다고요.”
못 나오게 했다는 말에 하람의 안색이 싹 변한다. 못 나오게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을 테다. 특히 그 일하라고 지긋지긋하게 잔소리해대는 히지카타마저 그랬다면 더더욱.
“너 어디 다쳤어?”
많이 다친 건 아니라고 둘러대려는 소고를 하람이 집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빨리 바른대로 다 불으라는 하람의 눈빛에 소고가 시선을 피한다. 하람이 양 뺨을 잡고 자신의 쪽을 보게 하자 소고가 그제야 조금 털어놓는다.
“그냥 일 때문에 나갔다가 좀 다친 겁니다. 거의 다 나았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괜찮다고요?”
멍청아, 걱정을 어떻게 안 해. 근데 평소엔 일도 안 하는 게 왜 나가서 다쳐 오기나 해, 걱정인지 욕인지 모를 말들에 소고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하람은 꽤 나 잔소리를 많이 했다.
“그럼, 너. 왜 연락은 안 받은 거야?”
은근히 눈길을 피하며 침묵으로 일관하자 하람이 아예 소고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환자라고 해도 듣지를 않는다. 제대로 말할 때까지 놔주지 않겠다는 것 같자 그제야 슬쩍 대답한다. 절대 안정이라면서 핸드폰을 빼앗겼다고. 오늘 간신히 받은 것이라고. 꿍얼대듯이 털어놓는 게 귀엽다. 아직도 자신을 어린 애 취급하는 곤도와 히지카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듯이. 아마 하람에게는 별로 털어놓고 싶지 않았을 내용이었을 터다. 말투와 표정을 보니 영락없다.
하람이 잡고 흔들던 손을 멈추고 소고를 빤히 쳐다보다가 그냥 안아버린다. 아직 어린 애 맞네. 어려. 놀리듯이 말하는 하람의 말투에 소고가 투덜댄다. 누님마저 어린 애 취급할 줄은 몰랐다. 근데 진짜 어린 애는 아닌데, 그런 취급하지 말라는 둥.
한참을 꿍얼대다가 소고가 한마디를 툭 던진다. 근데, 저. 오늘 안 오면 진짜 헤어지려고 했습니까?
하람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응. 그러려고 했는데?
너무 칼 같은 답에 소고가 웃어버린다. 그럼 오길 잘했네요. 그대로 누님께 차일 뻔했어요. 안 그래요?
귀엽다는 듯이 푸흣, 웃음을 흘리고 하람이 소고의 머리칼을 헤집듯 쓰다듬었다. 잘했지. 잘했어. 앞으로는 막 연락 없이 사라지고 그러면 안 돼. 약속?
손가락을 내미는 모습이 영락없이 소고를 어린 아이 취급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소고는 손을 내밀어 자신도 손가락을 걸었다. 그래요, 약속. 누님도 막 사라지지 않기입니다. 막 사라지면 저도 그대로 사라져서 다시는 안 돌아올테니까요.
소고 멍청이, 난 너처럼 막 안 사라져. 너나 사라지지 말라구.
누가 멍청이입니까. 내가 멍청이면 누님은 바보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