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 거리마다, 들어가는 가게마다 흥겨운 캐롤과 잔잔한 스피츠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매장마다 문 앞에는 크리스마스 리스도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어느새 내일로, 한 해의 마지막 행사인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안데르센의 동화처럼 행복에 겨운 얼굴 표정들은 아니었지만 연인, 가족, 친구 등으로 놀러 나온 사람들의 얼굴은 웃음꽃이 펴 있었다.
“하아-“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숨은 뿌옇게 얼어 형태가 보였다. 영하로 내려간 기온은 마이너스. 당장에라도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하아- 다시금 찬 숨을 뱉었다. 야나기는 광장의 시계탑 아래에서 시려오는 손을 모아 비볐다. 헤드폰에 가려진 귀로 흘러오는 스피츠의 잔잔한 노랫말을 들으며 입고 있는 코트의 소매를 살짝 올려 시계를 보았다. 오후 열두 시. 삼십 칠 분을 넘어가는 중이었다.
아카아시와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기에 추위도 피할 겸, 몸도 녹일 겸 커피라도 마실까 생각했다. 데록데록 눈을 굴려 시계탑 근처에 있는 카페를 보았다. 대부분의 카페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 금방 생각을 접었다. 슬슬 부는 바람에 속이 시려 옷깃을 고쳤다.
“…아. 노,… 노아.”
“! …어, 왔어요?”
귀를 덮은 헤드폰 때문에 누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한 탓일까. 어렴풋이 제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잡는 손에 놀라버렸다. 황급히 헤드폰을 목 아래로 내리며 뒤를 보았다. 눈에 들어온 상대를 보고서야 놀라 뻣뻣하게 굳은 긴장을 풀었다. 크게 반응하는 야나기를 따라 같이 놀라 당황한 얼굴로 서 있는 아카아시가 있었다. 어깨를 잡은 손이 갈 곳을 잃고 허공에 맴돌았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놀라셨어요? 어색하게 웃으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노래 듣느라 온 줄 몰랐어요.”
“아닙니다. 그보다, 제가 일찍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응? 아아, 근처에 볼 일이 있어 일찍 나왔다가 시간이 남아버려서요.”
집에 다시 가기도 그렇고 해서? 그럼 어디 카페라도 들어가셨어야죠. 장갑도 없이, 손이 다 얼었잖아요. 에에, 하지만 봐요. 저렇게 사람이 많다구요-? 단호하게 혼내는 목소리엔 걱정이 가득했다. 손끝이 빨갛게 변해 언 것을 본 아카아시가 미간을 찌푸리며 제 손으로 감쌌다. 평소 체온이 높은 아카아시라 언 손이 조금은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내리깐 눈으로 제 손에만 집중하는 그를 본 야나기는 베시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케이지. 많이 따뜻해졌어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을 잠시 본 아카아시는 그대로 그녀의 손을 잡고 움직였다. 왼손은 제가 잡겠습니다. 오른손은 코트 주머니에 넣으세요. 네에- 장난스레 대답하면서도 착실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브에도 거리에는 시청에서 하는 공식행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마 내일은 더 엄청나지 않을까 지레짐작했다. 점심 때를 넘어가는 시간에 식당이나 카페를 나온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이 만든 파도에 떠밀릴 것 같아 야나기는 아카아시의 손을 조금 힘주어 잡았다.
이곳 저곳을 걷고, 구경하면서 만나지 못한 동안의 일들을 풀어냈다. 평소의 야나기는 정말 지극히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아카아시와 함께 있으면 본인도 놀랄 정도로 말이 많아졌다. 야나기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아카아시는 적당히 리액션을 해주거나 맞장구를 쳐주었다.
“취-!”
연거푸 부는 바람에 몸이 식었는지 재채기를 했다. 에취! 또 한 번 재채기를 하는 것에 아카아시는 곧장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 살폈다.
“아무래도 안되겠어요. 어디 따뜻한 곳에 들어가요.”
“킁, 그래야겠네요. 늦게나마 점심 먹을까요?”
“네, 전에 노아가 가고 싶다던 맛집이 여기 근처인데, 그리 가실래요?”
코를 훌쩍이며 야나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아시는 그런 야나기를 보더니 매고 있던 백팩을 앞으로 내려 지퍼를 열었다. 뭐하나 가만히 보고 있으니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하나 꺼냈다.
“…에?”
“조금 이르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저에게 내미는 상자를 보며 야나기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눈을 깜박였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겨우 손을 내밀어 상자를 받았다. 조금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렇게 보지만 마시고 열어보세요. 열어드릴까요? 아이 다루듯 하는 말에 야나기는 그제야 상자에 묶인 리본을 풀고, 뚜껑을 열었다. 뚜껑을 아래로 내려 겹쳐 잡았다.
“어…, 목도리?”
“지난번에 잃어버렸다고 했잖아요. 노아라면 잃어버린 채로 둘 테니까요.”
“하하, 케이지는 날 너무 잘 알고 있네요. 응, 예쁘다. 고마워요.”
근데, 난 오늘 준비 안 했는데.. 괜찮습니다. 노아에겐 늘 받기만 했으니까요. 그 동안의 제게 해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라기엔 너무 약소하지만 받아주세요. 상자 안에 담긴 꽈배기식으로 짜인 베이지컬러의 목도리를 집어 야나기의 목에 둘러주며 아카아시가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조금은 덜 추울겁니다. 밥 먹으러 가요. 매듭까지 지어주고서 다시 손을 잡았다. 얼굴의 절반을 가릴 정도로 도툼하고 따뜻한 것에 야나기는 얼굴을 부볐다.
영화를 보고, 저녁까지 먹은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여전히 거리엔 사람이 많았다. 해가 지니 더 불어오는 바람과 추워지는 날씨에 아카아시는 걸음을 재촉했다. 복잡한 상가지역을 벗어나 한적한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집집 마다 걸린 크리스마스 리스들은 제각각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끔씩 들리는 남의 집 티비소리는 연말을 맞은 관광명소를 소개하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꼭 마주잡은 두 손은 열이 올라 후끈했다. 그럼에도 놓기는커녕 더욱 깍지를 껴 잡았다. 야나기의 집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잠깐 차 마시고 갈래요?”
코 앞에 다가온 맨션을 보며 한 말이었다. 모처럼 아무런 방해 없이 둘만 있게 되었는데, 헤어지기 싫다. 그런 야나기의 마음을 아는지 아카아시가 눈을 마주해 왔다.
“안됩니다. 여성 혼자 있는 집에 함부로 남자 들이는 거 아닙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해주는 그에 야나기는 그럼 그렇지,라며 웃었다. 잡은 손을 풀었다. 빙글, 몸을 돌려 아카아시를 마주 보았다. 입꼬리를 당겨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케이지랑 오랜만에 데이트해서 무지 행복했어요. 선물도 고마워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노아랑 시간을 보낼 수 있어 행복했어요.”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네, 노아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요. 응, 그럼 연락해요. 맨션 입구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던 아카아시는 갑자기 몸을 돌려 제게로 다가오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잊으신 거라도 있으세요?”
“네, 있어요.”
“뭔데…”
말이 맺어지지 않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 닿은 말랑한 촉감의 무언가. 그게 무엇인지 인식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살짝 든 뒤꿈치가 다시 바닥에 닿음과 동시에 시야 전체로 야나기의 얼굴이 들어왔다.
“목도리에 대한 보답이에요. 사랑해요, 케이지.”
마지막으로 뺨에 키스까지 해주곤 곧바로 입구로 쏙 들어가버렸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아카아시의 얼굴은 이미 뒷목까지 붉게 물들어버렸다.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는 열기의 감촉에 입술이 닿은 부위가 화끈거렸다.
“…정말이지…”
주륵, 주저앉아 마른세수를 하며 붉어진 얼굴을 식히려 애썼다. 싫지만은 않은 얼굴로 아카아시는 야나기가 걸어간 맨션의 입구를 보았다. 그의 머리 위로 하얀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