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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갈은 먹의 냄새는 진하고 부드러웠다.

한 해가 다 끝나가는 12월의 어느 오후. 따뜻한 차와 과자, 그리고 연하장을 한가득 쌓아놓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옥졸들은 모두 붓을 들어 제 나름대로 텅 빈 연하장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으음, 뭘 써야 되는 걸까”

“어이, 히라하라! 먹물 튀니 조심해라!”

“아, 미안~!”

 

아무리 공동생활을 하는 사이라고 해도, 연하장을 작성하는 스타일은 천차만별이다. 아직 아무것도 못 쓰고 망설이고 있는 키노시타 같은 타입이 있나 하면, 진작 다 쓰고 뻗어버린 타가미 같은 타입도 있다. 정신없이 북적북적한 자리. 혼자 입을 꾹 다문 채 다 쓴 연하장을 쌓아가던 키리시마는 제 옆자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에노키는 벌써 연하장의 반 정도를 써놓은 상태였다. 간결하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만 적은 것부터 구구절절 잡담을 쓴 것까지. 전부 염마청에 보내는 걸까. 다른 동료들보다 월등히 많은 연하장을 쓰고 있는 에노키는 너무 바빠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자신을 보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이번 건 조금 길군’

 

뭐가 그리 적을 말이 많은 걸까. 지금 그녀가 쓰고 있는 연하장은 까만 글씨로 종이가 가득 차 흰 부분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염마청의 사람일까? 옛 동료들 중에서도 특히 사이가 좋은 상대라면 쓸 이야기가 많겠지. 그녀가 염마청을 떠나 특무실에 온지 꽤 시간이 지났으니까.

궁금한 건 많아도, 내용까지 읽는 것은 실례지. 예의를 잘 알고 있는 키리시마는 자세히 연하장을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렸지만, 그 내용이 뭔지 자꾸 신경 쓰여 손이 멈추고 말았다.

 

“드디어 다 썼군. 나는 간다. 너희들도 얼른 끝내”

“아, 수고했다. 타니자키”

 

제 손이 멈춰있는 사이 동료들은 하나 둘씩 자리를 떠나간다. 바글바글 모여 있었단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늘어나는 빈자리, 줄어드는 말소리들.

정신을 차려보니 방에 남아있는 것은 자신과 에노키뿐이었다.

 

“응? 키리시마, 아직 남았어요?”

“아아. 어쩌다 보니”

“뭘 쓸지 고민하고 있는 거예요? 그 마음 잘 알지~”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거짓말을 못 하는 키리시마는 제 솔직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까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매년 보내는 연하장은 모두에게 있어 그냥 연말 행사 같은 것이지. 연애편지를 쓰는 것 마냥, 연하장에 머리를 쓰거나 진심을 담아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안면이 있는 사람에겐 모두 보내야 하는 연하장을 쓰는 건, 만날 때 마다 ‘안녕’하고 인사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키리시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연하장이란 소홀히 해선 안 되는 예의지만, 심혈을 기울일 필요도 없는 연말인사일 뿐이라고.

 

“너는 아직 많이 남은 것 같군”

“연하장이요? 음, 그래도 꽤 많이 썼지 않아? 이제 특무실 사람들 것만 쓰면 된다고요!”

“…그런가?”

 

그럼 지금 쓰고 있는 연하장은 제가 아는 사람에게 보내는 연하장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키리시마는 내용은 파악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슬쩍 그녀의 연하장을 훑어보았다. 종이에 적힌 글자는 빽빽하지도 텅 비어있지도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적당히 써져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매일 얼굴을 보는 사이에 주고받을 내용치곤 길게 느껴지는 정도라 할까.

 

“키리시마는 많이 안 남았네요!”

“확실히 너보다 적게 남았지. 나는 보낼 곳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헤헤… 그래도 내 것도 있겠죠, 거기?”

“그렇지”

 

아직 쓰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줄 연하장도 써야한다. 그리고 그녀도 제게 줄 연하장을 써야하겠지. 올해는 또 제게 뭐라고 써주려나. 키리시마는 작년에 제가 받은 연하장을 떠올렸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올 한해 고마웠어요! 내년도 잘 부탁해요!’ 간단한 문구와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은 크고 작은 꽃들. 원숭이의 해라고 원숭이를 그려 넣었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런저런 색을 써서 아예 꽃밭을 만들어 놓았던 그 연하장에선, 먹 냄새 대신 꽃향기가 나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었다.

 

“내 건 벌써 썼나?”

“응? 아, 키리시마 연하장이요?”

“응”

“아뇨, 키리시마에게 줄 건 맨 마지막에 쓸 거거든요”

 

킥킥. 그렇게 대답한 에노키가 수줍게 웃었다. 전혀 수줍어 할 일이 아닌데, 뭘 저리 봄꽃처럼 웃는 걸까. 아무리 같이 있는 세월이 길어져도 키리시마는 이렇게 에노키를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있어 괴로웠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그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매년 줄어들고 있다는 거겠지. 예를 들어 작년이었다면 그녀의 수줍은 미소에서 아무런 것도 읽을 수 없었겠지만, 지금의 그 미소 속의 행복함을 엿볼 수 있었다. 기분 좋은 것을, 좋아하는 것을 떠올릴 때면 늘 뿜어져 나오는 행복함의 기운을.

 

“올해는 작년 것 보다 더 예쁘게 만들어서 줄 테니까, 기대해도 좋아요”

“그런가. 기대하지”

“음! 깜짝 놀랄 테니까 말이지!”

 

아예 편지 전체를 꽃으로 도배하기라도 할 셈인가. 다른 사람 같으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고 말하겠지만, 에노키라면 또 모르지. 그녀는 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존재였으니까. 예상할 수 없는 다정함, 자비, 상냥함과 의외의 냉정함. 하나로 묶기 어려운 개념들을 자연스럽게 녹여낸다면, 아마 그걸 ‘에노키’, 그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괜히 온 몸이 간지럽다. 키리시마는 가슴 속부터 차오르는 묘한 간지러움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새 연하장을 꺼냈다. 생각난 김에 그녀에게 줄 연하장을 쓰자. 그는 새하얀 백지 위에 잠깐 붓을 올렸다가 떼었다.

뭘 쓰면 좋을까. 일단 ‘새해 복 많이 받아라’는 꼭 들어가야겠지. 그럼 그것 외에는? 작년엔 엉성하지만 원숭이를 그려줬더니 좋아했었는데, 이번엔 닭이라도 그려줘야 하는 걸까. 닭은 어떻게 그리더라? 그냥 병아리로 그리면 안 되려나. 그녀에겐 오히려 병아리가 더 잘 어울리는데.

넘쳐나는 생각에 비해 종이의 면적은 터무니없이 적다. 연하장이 원래 이렇게 작았던가.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일단 새해인사부터 쓴 키리시마는 다시 에노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노키는 벌써 마지막 연하장을 쓰고 있었다. 마지막. 제게 올 연하장을.

 

“…좋아! 다 됐다!”

 

고개를 번쩍 든 그녀는 자신을 보고 있는 키리시마와 눈이 마주치고 잠깐 몸을 움츠렸다. 혹시 내용을 본 건 아닐까 경계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방어태세는 오래 가지 않았다.

 

“정말이지, 훔쳐보는 건 반칙이에요!”

“내용은 못 봤다만”

“정말이죠? 진짜?”

“그래”

 

그가 거짓말을 못 하는 건 특무실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침묵하는 일은 있어도, 거짓말은 못 한다. 그게 키리시마라는 남자니, 에노키의 의심은 저절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난 먼저 갈게요, 힘내요 키리시마!”

“알았다. 쉬도록”

 

먹이 다 마른 연하장들을 들고 스리슬쩍 나가는 그녀를 지켜보던 키리시마는 다시 붓을 움직여 그녀에게 전할 말들을 적어 내려갔다. 어차피 내년에도, 그 내년에도 자신들은 이렇게 연하장을 쓰겠지. 그렇다면 괜히 이별하는 것 마냥 구구절절 이야기를 쓸 필요는 없다. 제가 그녀에게 남길 말은. 그저.

 

‘올해도 같이 있을 수 있어 다행이군’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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