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즈가 태어난 날은 딱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 31일이었다. 그래서 이번 대의 무녀는 별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라온 탓에, 태어난 날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세이즈는 알지 못했다. 원칙적으로 무녀는 동군과 서군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하기에 선물 같은 게 들어온 기억도 없었다.
“생일?”
“네, 집주인 할머니가 알려주셨어요. 12월 31일 맞죠?”
생일을 기념해 케이크를 살 거라고 한조는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목도리를 꼼꼼하게 둘러주고는 현관을 나선 한조를 세이즈가 뒤따랐다.
“그런데 이거 연말 기념이기도 하겠네요. 아, 세이즈 님 생일이 더 중요하지만요! 매번 이로하 누님이랑 연말을 보내긴 했어도 케이크를 먹은 적은 없었거든요.”
세이즈로서는 연말 기념이라도 상관없었다. 막 도시로 왔을 때라면 생각한 것을 바로 입밖으로 꺼내 상대를 무안하게 했겠지만, 한조의 말이 그의 배려라는 사실을 아는 지금은 그러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맞다, 세이즈 님은 어떤 케이크를 좋아하세요?”
“…잘 몰라.”
케이크 역시도 먹어본 적 없는 음식 중 하나였다. 애초에 줄곧 산 속 동굴에 살다, 겨우 몇 달 전에 이로하와 한조네 방에 얹혀살게 됐으니 당연했다. 한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럼 가게에서 보고 고르죠! 마음에 드시는 게 있을지도 몰라요.”
자기가 더 신난 한조를 보자 세이즈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태어난 날에 대해서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 한조가 즐거워하는 거라면 좋게 생각됐다.
“저기 보이네요, 가게. 연말이라 닫았으면 어쩌지 했는데 다행이에요.”
한조는 먼저 달려가 문을 열더니 세이즈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런 한조를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행동의 뜻을 알기에, 세이즈는 가게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저쪽에 케이크가 진열되어 있죠? 드시고 싶으신 걸로 고르시면 돼요.”
한조의 안내를 따라 진열장 앞에 서자 갖가지 색의 케이크가 보였다. 무심히 안을 둘러보던 세이즈의 입에서 나온 첫 감상은 모양에 대한 것도, 예상한 맛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비싸.”
“괜찮아요, 마음대로 고르세요. …실은 세이즈 님 생일이라고 집주인 할머니가 돈을 보태 주셨거든요. 케이크 사 드리라면서.”
집주인의 이야기를 하며 한조가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소곤거렸다. 매번 집세를 독촉하기에, 셋이 사는 집에서 집주인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상사격인 세이즈 뿐이었다.
“한조는?”
“네?”
“어떤 걸 좋아해?”
세이즈가 진열장을 가리키며 묻자, 한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세이즈를 쳐다봤다.
“지금 고르는 건 세이즈 님 생일 케이크인데요?”
“나는 잘 모르니까…”
무엇을 골라야 할지 망설여지는 상황에서도 세이즈는 한조가 우선이었다. 자신의 생일이기에 더욱, 한조와 함께 그가 좋아하는 모양이나 맛의 케이크를 먹고 싶었다.
“으음… 그럼 이 딸기 케이크로 괜찮을까요? 맛있어 보이는데.”
“응.”
한조가 그게 좋다면. 뒤의 말은 굳이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조금 들뜬 마음으로 한조를 따라 계산대로 가자, 곧 계산이 끝나고 케이크가 상자에 포장되어 나왔다.
“갈까요? 이로하 누님도 지금쯤 돌아오셨을 거예요.”
상자를 받아들고 가볍게 웃는 한조에게 세이즈도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어, 어라.”
들어왔던 문을 나서자, 한조가 이상하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봤다. 덩달아 위를 바라보자, 세이즈의 얼굴에 차가운 뭔가가 닿았다.
“눈…”
“갑자기 올 줄은 몰랐는데. 어쩌죠? 눈 맞고 세이즈 님이 감기에라도 걸리시면 전 누님한테 죽을 텐데!”
덜덜 떠는 한조와 달리 세이즈는 언제나처럼 침착했다. 금방 그칠 눈이 아니었기에 어차피 맞으며 집까지 가야 했다. 기왕 한조와 함께이니 조금쯤 눈을 맞는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괜찮아.”
세이즈가 다독이듯 한조를 응시했다. 그래도 상대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럼 제 코트라도 벗어드릴까요? 전 또 감기 걸려도 되지만, 세이즈 님은…”
“한조.”
혼내기라도 할 것처럼 이름을 부르자, 한조는 금방 체념한 듯 알겠다고 답했다.
“빨리 들어가야겠네요. 얼른 몸 녹이면 세이즈 님 말대로 괜찮을지도 몰라요.”
빨리 가자는 말과 달리, 한조는 세이즈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었다. 한조가 지금까지 세이즈를 많이 신경써주기는 했고, 그건 이로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전부 자신이 무도가들에게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특히 한조는 달랐다. 무도가가 아닌 일반인이기에 별의 무녀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탓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한조의 배려는 다른 사람들처럼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세이즈가 마음이 간 이유도 거기 있었다.
“세이즈 님, 눈 좋아하셨던가요?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어느새 씩 웃는 얼굴로 돌아온 한조가 말했다. 본인이 무표정이라는 것은 세이즈가 가장 잘 알았으나, 한조에게 겉에 드러나는 표정은 무의미했다. 항상 웃는 얼굴을 해도 짜증을 내던 텐텐의 속내마저 읽어냈으니, 세이즈의 변화 없는 얼굴에서마저 기분을 읽을 수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거 아세요? 첫눈을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맞으면 사랑이 이뤄진대요. 이건 올해의 마지막 눈이겠지만요. 아, 마지막 눈도 그랬나?”
세이즈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만약 정말이라면, 한조는 지금 세이즈와 함께 있어서는 안 되었다.
“이로하에게 가. 지금.”
“세이즈 님?”
한조가 이로하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한조도 세이즈가 왜 자신을 보내려고 하는지 바로 알아챈 눈치였다. 그러나 자리를 뜨는 대신, 한조는 직전보다도 즐거워진 듯 웃었다.
“에이, 괜찮아요. 누님이랑은 거의 매년 첫눈을 같이 맞았는걸요? 지금까지 안 된 걸 보면 거짓말일 거예요. 게다가 저는 세이즈 님도 좋아하니까요.”
“나도?”
마지막 말은 늘 고요한 세이즈의 눈동자를 흔들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한조도 아차 싶었는지 급하게 덧붙였다.
“아, 누님이랑 같은 의미는 아니에요! 좀 다른데… 죄송해요, 제가 주제넘은 말을 했죠?”
“…괜찮아.”
똑같은 감정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결코 실망하지도 않았다. 세이즈는 그저 한조가 자신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다시 해 줘. 아까 한 말.”
“네? 첫눈 얘기요?”
“아니. 더 뒤에. 내가 좋아?”
그제야 말뜻을 이해한 듯, 한조가 기쁜 표정으로 자신있게 말했다.
“그거라면 몇 번이고 해드릴 수 있어요! 저 한조, 세이즈 님이 좋습니다!”
“응. 됐어.”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졌다. 산에서 내려와 처음 경험한 이 가벼움은 항상 한조가 가져다준 것이었다. 지금은 한조의 좋아한다는 말이, 한조를 향한 세이즈 본인의 감정과 같지 않아도 괜찮았다. 세이즈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조금 빨리 하며, 처음으로 축하하는 생일과 다가올 새해가 쭉 행복하기를 하늘 저편의 별에 기도했다.